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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의 명장면 <18> 정성공 정권과 해양 대만
작성일 2019-07-05 조회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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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현 교수의 글이 게재된 국제신문 지면.

부경대학교 사학과와 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열여덟 번째 이야기는 ‘정성공 정권과 해양 대만’이었다.

5월 16일자 국제신문에 실린 ‘중국선 영웅, 대만선 해적 … 이율배반적인 평 받는 정성공’이라는 제목의 글이 그것이었다.

이 글의 필자인 부경대 조세현 교수(사학과)는 ‘역사적인 인물이 왜 이율배반적인 평을 받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중국의 정성공 사례를 소개했다.    

이 글에서 조 교수는 “해상 영웅으로 한국에 장보고가 있다면, 중국에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 있다.”면서, “중국 대륙에서 정성공은 네덜란드 식민주의자에게서 대만을 수복한 민족영웅 이미지가 강하다. 중국 영토였던 대만 섬을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영웅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만에서는 어땠을까? 조 교수는 “정작 대만에선 정성공 정권을 대만 섬 일부를 점령해 38년 간 통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처럼 외래 정권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심지어 영웅이 아니라 해적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고 소개했다.
    
조 교수는 “정성공은 국제무역상이자 해적 집단 우두머리였던 아버지 정지룡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부친을 따라 7살 때 복건으로 이주했다. 1644년 명이 멸망하고 명 황실 후예들이 남명(南明)정권을 세우자 그 가운데 한 황제인 융경제(隆慶帝)를 모셨다.”고 했다.

그는 “융경제가 만주족에게 살해당하자 정지룡은 청에 투항했으나, 아들 정성공은 하문을 근거지로 청에 대항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장기적인 반청운동을 위한 근거지가 필요했다.”면서, “1661년 3월 정성공은 2만5000여 명 병력과 400여 척 함선을 이끌고 금문을 출발해 대만해협을 건넜다.”고 소개했다.

그는 “수비병이 1100여 명에 불과했던 네덜란드 군대는 8개월간 대치 끝에 결국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공이 대만에 상륙한 사건을 보통 한인(漢人) 왕조가 처음 대만에 출현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그 후 해양입국의 정씨 왕조는 일본 나가사키와 대만 및 복건·광동 연해의 국제무역을 장악해 동아시아와 남양을 포괄하는 해상무역왕국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12세에 불과한 어린 정극상(鄭克?, 1670-?)이 정경을 승계했으나 대만 사회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1683년 청은 정성공의 부하였다가 투항한 시랑(施琅)을 수사제독으로 임명했다. 600여 척 선박에 6만 병사를 실어 팽호를 점령하고 대만을 공격했다.”면서, “결국 정씨 왕국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중국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대만사는 중국의 지방사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씨 해상집단의 흥망과 정성공의 반청복명을 다루면서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대만을 수복한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그런데 시랑이 대군을 이끌고 정씨 왕조의 대만을 정벌한 사건 역시 높이 평가한다. 시랑은 애국주의 영웅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성공도 ‘영웅’이고, 시랑도 ‘영웅’이라는 불일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처럼 역사에서 국가와 민족의 이름 아래 이율배반적인 해석이 나타나는 것이 어찌 정성공만의 사례뿐일까?”라고 반문하면서, “권력이 역사 해석에 간섭하려는 시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왜곡 현상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0516.2202200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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