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의 명장면 <19> 부산포 초량왜관의 생활상 | |||
작성일 | 2019-07-05 | 조회수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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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 부산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희망의 땅이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의 하나가 초량왜관이다. 초량왜관은 동아시아 외인 거류지 중 최대 규모로 조선왕조의 외교와 국방의 전초기지였다. 23일 국제신문 22면에 실린, 부경대 사학과와 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19회째 박화진 교수의 글은 바로 초량왜관이 주제였다. 이 글을 통해 부산에 있었던 초량왜관에 대해 알아두자. 박 교수는 “부산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대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교류해 온 항구도시.”라면서, “조선 후기 왜관은 부산포에만 설치되어 그 지역에 따라 절영도왜관·두모포왜관·초량왜관 시대로 구분되는데 바야흐로 동래부는 한일 양국 외교의 최전방으로, ‘가까운 타자(他者)’ 왜관과의 끊임없는 갈등·모순 극복을 통해 한일 양국 평화 유지에 주력하였다.”고 소개했다. 이 글에서 박 교수는 “초량왜관 시대(1678~1870년) 왜관 총책임자인 관수에 의해 기록된 일기들은 한일 양국 교류의 다양한 실상에 대해 알려줘 매우 흥미롭다. 참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초량왜관의 공간 구조에 대해 “총 면적은 약 33만578㎡(10만 평)으로 이전의 두모포왜관 보다 약 10배로 증가하여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서관으로 나뉘었다. 용두산 동쪽 해안가에 왜관 사람들의 거주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동관, 용두산 서쪽에 일본에서 파견되어 온 사절단의 숙소 공간인 서관이 배치되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거주자들은 주로 일본 쓰시마에서 건너온 수백 명에 이르는 성인 남자들로서 가족이나 여성을 동반할 수 없었다. 왜관 바깥에는 6개의 복병막이 설치되어 감시 하에 놓여 있어 동래부 허가 없이는 왜관 밖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일용 음식물 중 쌀·채소·생선 등과 같은 것은 왜관 수문 밖 새벽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으나 현지 조달이 불가능한 일본 술·두부·곤약·감귤 등은 쓰시마에서 가져왔던 것 같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17세기 말 초량왜관에서 발생한 이치하시 시로우에몬이라는 사람의 자살미수 사건을 언급하면서 ‘아직 빚도 많이 남은 상태에서 쓰시마로 돌아가게 되어, 빚 독촉 속에 수많은 걱정으로 이리저리 고민하던 중에 우울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덧없고 한 많은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에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자살 동기에 대한 당시 기록을 소개했다. 박 교수는 초량왜관에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자 우울증에 빠진 자살까지 시도한 이 청년의 사례를 통해 “부산포 초량왜관은 쓰시마를 비롯한 일본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희망의 장소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역사를 지닌 초량왜관을 연구하는 ‘부산초량왜관연구회’가 10년 가까이 부산서 활동하고 있는 등 ‘초량왜관을 부산만이 가진 콘텐츠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학계에서 활발하다. ‘초량왜관’이라는 해양문화의 명장면은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펼쳐 보여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0523.22022009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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