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의 명장면 9] 키드 선장, 비운의 해적 | |||
작성일 | 2018-03-21 | 조회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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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들이 필진으로 참여하는 국제신문 기획시리즈 ‘해양문화의 명장면’ 아홉 번째 이야기 주인공은 ‘키드 선장’이었다. 7일 국제신문 22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실린 이 기사의 필자는 부경대 사학과 박원용 교수였다. 제목은 ‘키드 선장, 비운의 해적’. 박 교수는 유명한 소설 ‘보물섬’에서 외딴섬의 보물을 찾아 나서는 해적선 선장 롱 존 실버와 관련, “그는 실제 존재했던 윌리엄 키드, 혹은 키드 선장이라 불리던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국가의 명을 받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뛰었던 키드 선장은 그 국가에 의해 불행하게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사략선(私掠船)’이라는 낯선 단어가 등장한다. 국가의 허락으로 개인이 무장시킨 선박을 말한다. 박 교수의 글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사람인 키드는 당시 식민지인 아메리카의 뉴욕에 진출하여 1695년 이 사략선의 선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키드가 무장선박의 선장이 된 이유는? 박 교수는 “(뉴욕과 매사추세츠 총독으로 임명된 벨로몬트 백작 리차드 코트가) 식민지로 들어오는 물건을 약탈해 식민지의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는 해적 토마스 튜, 존 아일랜드 등의 제거를 키드에게 요청했다.”면서,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도 키드에게 잉글랜드 식민지의 적국 선박을 나포해 이에 따른 이익을 챙길 권리를 부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어려운 시련’을 거쳐 겨우 나포했던 선박이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던 것. 박 교수는 “(키드의 사략선인) 어드벤처 갤리호는 프랑스 국기를 내건 상선 ‘퀘다 머천트’호를 나포했다. 이 배에는 비단, 금, 은 등 값비싼 화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 화물은 무굴제국 황제와 가까운 귀족의 소유였다. 동인도회사에 대한 무굴제국 지배층의 반감을 야기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키드의 사략선 활동을 후원하며 이득을 챙기던 휘그 정치가들에게 동인도회사의 위상 축소는 인도양 무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인도양 무역 패권을 다투던 잉글랜드 집권세력 휘그당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다면, 정권을 토리당에 넘겨줄 수 있었다.”면서, “토리당의 정치공세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키드의 사략선 활동을 후원한 휘그 정치세력은 관계를 단절할 필요가 있었고, 그를 사략선업자가 아닌 ‘해적’으로 재규정해야 했다.”고 소개했다. (맙소사!) 박 교수는 “1701년 잉글랜드로 압송된 키드는 해적 행위와 윌리암 모어 살해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키드는 결국, 해양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가 아직 확실하게 미치지 못한 때 국가권력에 이용되다가 버려진 비운의 인물이었다.”고 덧붙였다. 키드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인도양 무역패권을 둘러싼 주위의 이익이 얽힌 복잡한 프레임 속에 던져졌고, 결국 이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했던 것이다. 이것이 317년 전의 일일 뿐이라고? 박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겠다. 권력의 냉혹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떤 잣대로 측정하는가에 따라 일의 향방이 달라지는 일상의 일도 다반사다. 그래서 웃으며 즐겁게 가는 능동적인 삶이 빛난다. 파도는 고요한 바다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Go, Everyone! <부경투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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