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의 명장면 <43> 바다 건넌 조선 매, 쇼군을 매료시키다 | |||
작성일 | 2019-07-05 | 조회수 |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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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조선의 매였다. 12일 국제신문 20면에 실린 이 글의 필자인 박화진 교수(사학과)는 글 모두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각별했던 매 사랑을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에도막부 제1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1542-1616)는 더할 나위 없이 매사냥을 좋아하였던 것 같다.”면서, “그의 생애 1000회가 넘는 매사냥을 하였다.”고 소개했다. 이런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각별한 매 사냥 사랑에 대해 박 교수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교외로 나가 백성의 정세를 시찰하는 한편, 신체 단련, 군사훈련, 가신단의 영내 지배 실태 조사 등을 겸하며,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 만들기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교토 귀족 및 다이묘(大名)를 비롯한 영주들의 매사냥을 금지하고, 나아가 매사냥에 쓰일 매의 일반 매매를 일절 금지했다. 매사냥을 일부 한정된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등 매는 쇼군 가문 도쿠가와 씨의 독점이 되고, 이른바 쇼군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조선 매는 매우 높이 평가받았던 것 같다.”면서, ‘관백 미나모토 이에야쓰가 조선의 매와 말을 요청함이 심히 간절하였다’는 조선의 외교서 기록을 소개했다. 조선의 매가 일본으로 간 통로는 조선통신사였다는 점이 바로 ‘해양문화의 명장면’이다. 박 교수는 조선 후기 12차례의 조선통신사를 통해 에도막부 쇼군에게 보낸 조선 매의 숫자를 400여 마리라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매번 최소 10마리에서 최대 55마리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에도막부가 조선 매를 하사할 때는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막부 주요 각료, 특히 가문의 격(家格)이 매우 높은 몇몇 다이묘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가문의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 매를 하사할 수 없는 다이묘 및 측근에게 간혹 매를 그린 그림을 하사하여 그 신임의 뜻을 표현하였다.”고 당시 일본에서의 조선 매의 인기를 소개했다. 박 교수는 “조선의 매는 중국에서도 해동청이라 불리며 높은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조선의 매는 세계에 자랑할 우수한 우리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1212.22020003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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