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의 명장면 <24> 항구에서 바라본 부산화교 | |||
작성일 | 2019-07-05 | 조회수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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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중국인들(화교)이 살게 되었을까? 특히 부산 초량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차이나타운까지 있으니 이참에 화교들의 부산 정착기를 알아보자. 부경대학교 조세현 교수(사학과)가 6월 27일 국제신문 22면에 게재한 <해양문화의 명장면> 24회 ‘항구에서 바라본 부산화교’라는 글에 그 내력이 자세히 소개된다. 조 교수의 말대로 해양네트워크와 관련해 살펴본 부산화교 역사의 단편이다. 화교들이 처음 부산에 들어올 때 중국에서 바로 오지 않고 일본에서 왔다는 점이 이채롭다. 조 교수는 이 글에서 “한국과 중국과의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오래 전부터 많은 중국인이 한반도에 거주할 법도 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화교 사회는 19세기말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면서, “다른 나라의 화교가 수백 년 전부터 현지 권력의 핍박을 받아가며 어렵게 성장한 것과 달리 초창기 한국화교는 청(淸)국의 지원 아래 손쉽게 정착한 특징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청국조계지가 만들어진 계기는 부산에서 발생한 덕흥호(德興號)사건 때문이다. 덕흥호는 부산화교 역사의 시작이라 흥미롭다.”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덕흥호 사건은 일본 고베에서 공흥호(公興號)라는 무역상점을 하던 광둥 출신 화상 황야오동(黃曜東)이 1883년 11월 부산의 일본전관거류지 안에 지점을 내려고 하다가 현지 일본 상인들과 일어난 충돌을 말한다. 조 교수는 “덕흥호 사건은 개항장 부산 인천 원산에 청국조계지가 설립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으며, 결국 왜관과 대비되는 청관(淸館)거리가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당시 부산항은 청상이 동해의 원산이나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인 훈춘 등과 교역할 때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골목이었다.”면서, “1920년대부터 부산화교 사회는 산둥 출신 이주민을 중심으로 안정화가 이루어졌으며 중국음식점이 주종을 이루었다. 부산항 매축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이 한몫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부산화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한국전쟁이다. 부산으로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화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는 “피란민 대부분이 초량 청관거리로 몰려들었다. 청관거리의 수용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영주동에 충효촌이 건설되었다.”면서, “충효촌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광둥성 상인 양무민(楊牧民)이란 사람이 목재를 싣고 바다에서 표류하다 선원 몇 사람이 죽었다. 이들이 바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빛을 따라 온 곳이 부산항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들이 빛이 나던 곳인 영주동 야산 자리를 사서 죽은 선원들의 묘지를 썼고, 그곳이 지금의 충효촌 자리라 전해진는 것. 조 교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중공군 반공포로가 부산화교의 일부를 구성한 사실도 이채롭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1992년 8월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맺어짐과 동시에 한국과 대만 간 국교가 단절됐다. 갑작스런 한중 수교로 대만 국적이던 부산화교들은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지만, 곧 제2 부흥기를 맞이했다.”면서, “현재 부산 초량차이나타운은 동남아 사람들까지 들어오면서 다국적 공간이자 관광 명소로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부산화교는 부산항과는 뗄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질기게 이어져 있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0627.2202201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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