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의 명장면 <22> 조선 선비, 청어장사를 하다 | |||
작성일 | 2019-07-05 | 조회수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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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은 6월 13일 22면에 부경대 사학과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22회 이야기 ‘조선 선비, 청어장사를 하다’를 실었다. 부경대 김문기 교수(사학과) 글이었다. 김 교수의 청어 이야기는 이 시리즈의 4회에서 소개한 유럽 발트해 청어에 이어 두 번째다. 그 때 글에서 김 교수는 발트해에 몰려드는 청어가 얼마나 많은지 선원들이 그 위에 미늘창을 꽂아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였음을 묘사한 그림도 우리에게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청어도 그랬다는 것이다. 그 때 청어는 조선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김 교수는 그 당시 ‘해양문화의 명장면’을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일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바로 이문건(1494~1567)이라는 선비의 일기다. 김 교수는 “노비들을 시켜 동해와 남해에서 나는 청어를 새재너머 괴산으로 판매했던 사람은 성주에 유배와 있던 어떤 선비였다.”면서, “이문건(1494~1567)이 그 주인공이다. ‘묵재(默齋)’라는 호로 잘 알려진 그의 삶은 사화와 유배로 점철되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이문건의)‘묵재일기’에는 대구, 넙치, 숭어, 조기, 전어, 삼치, 방어, 병어, 문어, 오징어 등의 바닷물고기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 물고기 중 가장 많이 유통됐던 것은 단연코 청어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묵재는 어떤 겨울에는 “거의 13만 마리 청어를 확보”해 유통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문건은 이처럼 풍부한 청어를 판매하여 경제를 일구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왜 하필이면 청어일까?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났던 물고기가 바로 청어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함경도에서 무진장하게 나는 명태를 묘사하면서, ‘청어가 명태와 더불어 가장 많이 나는데, 초여름에는 사방 수 백리 바다를 메워 청어를 먹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한 서유구(1764~1845)의 기록을 인용했다. 김 교수가 소개한 청어에 대한 정약전(1758~1816)의 관찰은 이렇다. ‘정월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해안을 따라 회유해 오는데, 이때 청어 떼는 수억 마리가 대열을 이루어 오므로 바다를 덮을 지경’이란다. 또 김 교수는 ‘청어가 너무나 많이 나서 선박으로 청어의 양을 헤아리기에 이르렀으며, 청어 1두름에 1~2문밖에 하지 않아 물려서 다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 논밭의 거름으로 쓰며, 더 심한 경우 버리기까지 한다고 했다.’는 유한준(1732~1811)의 말도 소개했다. 조선 후기 문신 성해응(1760~1839)은 “이른바 청어라는 것은 무리를 이루어 바다를 덮어 오는데, 사람이 배를 버리고 그 위에 설 수 있다”고 했다고 김 교수는 소개했다. 특히 김 교수가 인용한 이 말은 청어가 당시 민초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단백질원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규경이라는 사람은 “속언에 ‘궁핍한 선비와 가난한 백성들이 만약 청어가 없었다면 어떻게 소찬(素餐)을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으니, 과연 명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많던 청어는 다 어디로 갔을까! <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0613.22022004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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