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의 명장면 <21> 인도양 ‘해상제국’의 출현을 가능케 한 알부케르케 | |||
작성일 | 2019-07-05 | 조회수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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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와 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21회 명장면은 부경대 박원용 교수의 ‘포르투갈 정복자 알부케르케’ 이야기였다. 국제신문 6월 6일자 16면에 실린 이 기사의 제목은 「후발주자 약점 딛고 인도양을 ‘포르투갈의 바다’로 만들다」였다. 이 글에서 박원용 교수는 “포르투갈의 대양 진출의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바로 아폰수 드 알부케르케라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알부케르케는 16세기 초부터 인도양에 진출한 후발주자 포르투갈이 해상제국의 기초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포르투갈은 알부케르케 덕분에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만든 로마인들을 본받아 인도양을 ‘포르투갈의 바다’로 부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인도양은 1250년부터 1350년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양한 해상 세력과 육상 세력이 만나는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다.”면서, “인도양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해상세력, 즉 아랍인, 페르시아인, 중국 상인, 인도인 간의 경쟁은 치열했지만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인도양 전체에 대한 패권 확보를 기도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진출한 이후 기존의 인도양 ‘세계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발 주자인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다양한 해상 권역, 즉 아라비아반도, 인도 아대륙, 남중국해 각각 해상권역의 거점 항구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이러한 해상권역이 포르투갈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체제로 변화시키려고 했다.”고 밝혔다. 어떻게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정복했을까? 박 교수는 “각 해상권역의 거점 항구를 선으로 연결하여 이 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해상무역을 포르투갈이 전적으로 통제한다면 포르투갈은 그야말로 인도양을 ‘포르투갈의 바다’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었다.”면서, “알부케르케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정복사업 대부분을 완성하여 포르투갈이 해상제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알부케르케는 인도양 서쪽 호르무즈를 시작으로, 인도 고아, 말레이반도, 말라카 등 동서해역 주요 거점 항구들을 잇달아 정복한다. 박 교수는 “알부케르케가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 주목한 대상은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호르무즈였다.”면서, “호르무즈는 페르시아 만의 끝자락에 있어 인도양과 동부 아프리카로 나갈 수 있는 통로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알부케르케는 호르무즈를 1515년 다시 장악했다. 호르무즈는 이때부터 1622년까지 포르투갈 수중에 남아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 유지를 위한 장소로 기능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부케르케는 1510년 10월 2차 공략에 나서 무슬림 지배자와 오토만의 원군을 물리치고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 고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고아는 이후 인도 부왕령의 핵심 도시로 기능하면서 인도양의 포르투갈 관리 해역, 즉 ‘포르투갈의 고리’ 내부에서 무역을 하는 배에 대한 통행증인 카르타스를 발행하는 권리를 보유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1511년 말라카는 알부케르케의 수중에 떨어졌다. 말라카마저 장악함으로써 이제 포르투갈은 더욱 동쪽에 위치한 고급 향신료 산지로 알려진 순다해협과 말루쿠 제도까지 진출할 여건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는 또한 포르투갈에게 다른 유럽국가보다 먼저 당시 가장 부유했던 무역 상대국인 중국과 대면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0606.22016001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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