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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의 명장면 <37> 동래부 무관 이지항의 홋카이도 표류기
작성일 2019-07-05 조회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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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생이 국제신문 지면을 보고 있다. ⓒ사진 이성재(홍보팀)

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37회는 조선 사람으로서 최초로 일본 홋카이도를 가본 사람 이야기다.

지난 10월 31일 국제신문 20면에 ‘동래부 무관 이지항의 홋카이도 표류기’의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의 필자는 부경대 박화진 교수(사학과)였다.

박 교수는 이 글에서 “조선 사람으로서 최초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탐험한 동래 무관 이지항의 활약과 그가 남긴 ‘표주록(漂舟錄)’은 해양 표류 관련 기록으로 매우 높이 평가된다.”고 말했다.

동래 무관 이지항은 어쩌다 홋카이도까지 가게 됐을까?

박 교수는 “부친의 상을 당해 고향으로 가 상기를 마치고 병자년(1696년) 4월 영해(寧海)에 왕래할 일이 생겼는데, 부산 사람 공철(孔哲), 김백선(金白善)이 ‘읍에 사는 김여방(金汝芳)과 생선 대량 구입을 위해 배를 타고 강원도에 가는데, 그곳을 지난다’하여 동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은 동해(‘左海’로 표시됨)를 돌아 항해를 시작했는데 바람이 많이 불고 순탄하지 않아 포구마다 들러 정박했다.”면서, “4월 28일 바람이 조금 순해져 배를 움직였는데 신시(申時·오후 3-5시)께 횡풍(橫風)이 크게 일어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해 대해로 떠밀려 가 몇 날 며칠 큰 바다 가운데서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북동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생쌀을 씹어 먹고 약간의 물로 갈증을 풀면서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그러다 5월 12일 미시(未時·오후 1-3시)께 눈 덮인 산과 초목이 울창한 땅을 발견하고 정박했다.”면서, “다음 날(13일) 아침 겨우 상륙해 돌아보니 초가 20여 채마다 대구, 청어 등을 매달아 말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들의) 표류 기록은 북해도 최북단 제모곡 표착(5월 12일)부터 마쓰마에 출발(8월 30일)까지 약 110일 동안 체류에 대해 대체로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지항 일행은 홋카이도에서 만난 아이누인들이 얼굴이 검고 풍속이 달라 살해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으나, 아이누인들이 생선 등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사라져 교류를 시작했다. 아이누인들은 글자로 소통하는 풍습이 없었으며 털가죽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지항 일행은 아이누인들의 안내로 홋카이도에서 일본인들을 계서우(溪西隅)라는 곳에서 만난다.

그는 “계서우부터 예사치, 마쓰마에번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이지항이 그들에게 시를 지어준 것이 거의 100여 권이나 됐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와 같이 ‘표주록’에 따르면 홋카이도 아이누인들의 조선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뿐 아니라 동래부 무관에 지나지 않던 이지항의 문필력이 홋카이도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서, “이는 당시 조선 후기 부산 사람들의 지식과 인문학 수준이 대단하였음을 알려준다.”고 소개했다.<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1031.2202001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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