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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의 명장면 <41> 매향비, 바닷가 사람들의 천년 소원을 기록하다
작성일 2019-07-05 조회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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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호 교수의 글이 게재된 국제신문 지면.

바닷가 사람들은 왜 향나무를 개펄에 묻었을까?

부경대학교 사학과와 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41번째 명장면은 과거 천 년간 성행한 바닷가 사람들의 ‘매향(埋香)’ 풍습이었다. 필자는 부경대 신명호 교수(사학과)였다.

매향은 말 그대로 향나무를 비롯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바닷가 개펄에 파묻는 풍습이다.

신 교수는 이 글에서 “매향을 한 뒤에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비석이 바로 매향비(埋香碑)였다.”면서, “현재 매향비는 20여 개가 알려졌는데, 멀리 신라 때부터 가까이 조선 때 세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매향 장소는 서해안과 남해안 등의 바닷가.”라고 말했다.

매향 목적에 대해 신 교수는 “먼 훗날 미륵이 하생할 때 바닷가에 파묻었던 침향(沈香)을 가지고 미륵님을 만나 도솔천으로 가기 위함이었다.”면서, “도솔천에 가려면 우선 미륵을 만나야 했고, 미륵을 만날 때 최고의 예물이 바로 침향(沈香)이었다.”고 밝혔다.

바닷가 사람들의 꿈은 왜 도솔천에 가는 것이어야 했을까?
 
신 교수는 “조선시대 유교와 양반이 바닷가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 양반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며 농업을 국가 산업의 근간으로 인정했지만, 어업은 언급 자체가 없었다. 이는 정책 배려가 전혀 없었다는 뜻과 같다.”고 했다.

그는 “왜구가 창궐하면서 가장 먼저 생존 위협을 당한 사람들은 바닷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바닷가 사람의 생존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선 자신들부터 살고자 했고, 여력이 생기면 농민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바닷가 어민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닷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매향이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그들은 이 땅 권력자들에게 기도하고 간구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미륵에게 기도하고 간구했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과거 천 년간 바닷가에서 성행한 매향 풍습은 이 땅의 꿈을 빼앗긴 바닷사람들의 꿈을 향한 함성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81128.2202101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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